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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일 사이

국시를 앞둔 몇몇 4학년 학생들로부터 편지를 받는다.

 

어쩐 일인지

나는 강의실 수업으로 종양학이나 유방암에 대해 수업을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가끔 실습을 나온 학생들에게는 종양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암환자를 진료하는 것의 학문적인 측면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있었지만

강의실에서 주로 수업을 듣는 1,2학년 학생들에게는

임상의학 입문으로 나쁜 소식 전하기, 의사와 환자의 관계, 선택수업으로 있는 호스피스 수업에서 말기암환자에게 항암치료를 하는 것의 의미, Women in Medicine 수업에서 여자의사로 일한다는 것 등의 (소위 마이너) 분야로 수업을 주로 했던 것 같다.

 

주제가 그래서 그런지,

슬라이드를 많이 만들어서 많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 보다는,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고 단답식이라도 답을 들어보고 롤 플레이도 해보고

환자의 실례를 들어 구체적으로 그리고 솔직하게 수업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수업을 하면서 신이 난다.

자신하건대

수업시간에 꾸벅꾸벅 조는 학생들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슬라이드를 많이 만들지 않으니 쳐다볼 슬라이드가 없어서 졸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수업이 끝나면

자체적으로 피드백을 받아본다.

 

가장 놀라웠던 반응은

학생들이

실재 임상상황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환자 및 가족들과 면담을 하면서,

의사가 겪는 수많은 갈등과 어려움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왜 공부를 열심히 해야하는지 알겠다는 의견이 많았다. 

의대생들은 기본적으로 동기부여가 아주 잘 되어 있고, 습관적으로 성실하며, 아주 열심히 공부한다.

 

뭐든지 열심히 하지만

가끔은 왜 이렇게까지 해야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싶은 순간이 많을 것이다.

학생들은 그 답을 찾지 못해도 열심히 공부한다.

그런 학생들이 '왜'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왜' 공부를 열심히 해야하는지를 느끼게 되었다는 의견이 많아서

내심 뿌듯했다.

 

수업을 하고 나면

내가 실재로 그런 사람은 아니지만

학생들은 나를 통해 환자를 열심히 보는 의사가 되어야 겠다고 결심하기도 하는 것 같았다. 

지금 당장 뭔가를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지만

나도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결심하는 메일을 보내는 학생들이 있었다.

 

 

국시를 준비하는 4학년 학생이 오늘 나에게 보낸 메일은

그 무엇보다 나에게 값진 선물이다.

 

교수님의 환자를 사랑하는 마음과 열정은 저에게 그리고 제 주위의 많은 학생에게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값진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계속 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수업시간때 교수님께서 하셨던 말씀들과 표정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런 가르침을 받을 수 있어서 우리 학교가 자랑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직접 찾아뵙고 감사 전해드렸어어 하는데.. 얼굴도 안보이는 인터넷 상으로나마 감사하다는 말씀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서글프게도 선뜻 마음 전하기 힘든 곳이 병원인것 같습니다.

병원을 떠난다는 소식에 '아이고 우리 환자들 어떡해...' 이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교수님은 그런 의사선생님 이십니다. 저의 꿈은 좋은 의사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에 집중하다보면 꿈은 점점 작아만 집니다. 그때마다 다시 꿈꿀 수 있게 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끝까지 열심히 해서 부끄럽지 않은 의사가 되겠습니다. 교수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어디에서든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라는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리고 부끄럽다.

 

4학년이면

임상실습을 통해 병원의 분위기를 어렴풋이 알게 된 때.

당장 내년부터 인턴으로 일 할 생각에 설레임과 두려움의 양가감정이 있는 시기.

그들은 나의 수업을 듣고 나의 블로그를 통해 환자를 보는 진료현장에서 어떤 갈등이 초래되고 있는지, 왜 개인이 최선을 다해도 좋은 의사가 되기가 어려운지,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법과 제도와 시스템의 존재를 경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의기양양 의대생이 되었지만

한 해 두 해 시간이 가고

병원 실습을 통해 레지던트 펠로우 교수들의 삶을 보고

생각만큼 환자들로부터, 국민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는 의사의 사회적 지위와 현실을 접하며

충격을 받고 실망한다.

그런 그들이

냉소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이기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겸허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어려움이 많으니 더 노력해야 겠다고 결심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의사, 뛰어한 의학자로 성장할 수도 있다.

 

그래서

교육은 중요하다.

 

내 논문 하나를 publish 하는 것 보다

선생이라는 지위에서

학생들에게 올바른 가르침을 주고 더 많이 고민하게 하고 또 함께 고민해 주는 것이 더 중요할 지도 모른다.

그들은 나보다 훨씬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에게는 나의 한계와 과오를 넘어서

더 능력있는 의사로 성장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선생'이 필요하다.

그게 우리 미래를 위해 가장 중요한 투자이다.

 

우리 학교는 내년 본과 1학년 학생부터 A,B,C,D 와 같이 등급을 매기지 않고

Pass or Fail 로 평가시스템을 바꾼다고 한다.

전체 120명의 학생을 30명의 단위로 묶어 각각 책임지도교수가 있고

그들을 보다 가깝고 밀접하게 지도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 담당교수가 얼마나 교육에 전념하고 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는 형편이 될지 모르겠다.

나는 학생 교육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담당 교수를 한번 해보고도 싶지만

임상으로서 지금까지 했던 일을 모두 다 하면서

학생들까지 담당하라고 한다면 제대로 못할 것 같다.

 

학생들은 새로운 평가 제도 하에서 적절한 능력을 함양하고 성적에 얽매이기 보다는 더 넓은 관점으로 의학과 의료를 고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위해 새로운 뭔가를 더 시도하고 도전해야 할 것이다. 책상 앞에서 족보만 파서 좋은 점수를 얻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다.

 

좋은 평가를 위해 화려한 스펙을 쌓기 보다는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한 전초전으로

많은 것을 경험하고 고민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병원에서는

그렇게 대학에서 배출된 학생들, 모든 과목을 pass 하고 온, 외관상 다 똑같은 학생들을 어떻게 평가하여 임상과 전공의로 선발하고 이후 연계된 교육을 할지에 대해 미리 고민해야 한다. 우리 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다른 학교의 학생이 대학 성적표를 가지고 올텐데 어떻게 객관적으로 우리 학교 학생들과 평가할 것인지 기준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학생 때의 경험과 고민이 이어지고 전공의 수련 기간동안 그 노력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연계 시스템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의과대학 교육 커리큘럼의 개혁만으로는 좋은 의사 만들기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없다.

전공의 숫자를 줄이고 있고 병원 인건비를 축소하기 위해 펠로우 숫자도 줄이고 새로운 교원을 뽑는 것이 점점 어려워 지고 있는 마당에

그들의 교육을 누가 어떻게 담당할 것인지도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의과대학 교수이기도 하고 병원에서 임상진료를 담당하는 의사이기도 한 사람들은 그런 부분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다. 학생들에게 좋은 멘토가 되기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이 없다. 어차피 일정 기준을 갖춘 학생들일테니 그놈이 그놈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유일하게 객관적으로 평가 가능한 국시성적에 초점을 맞추어 성적대로 사람을 뽑아버리는 무성의한 정책을 선택하면 안될 것이다.

 

 

2000년 의약분업 당시 의료계는 총파업을 했었다.

그것으로 무엇을 얼만큼 얻었을까?

무엇보다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

과정이 어떠하든...

 

14년만에 또 다시 의료계가 파업을 하겠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만큼 의료계가 절박하고 어려운 일이 많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또 다시 국민의 신뢰를 잃는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파업을 하겠다는 의지가 강력하다.

그러나 개원가와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들의 이해관계는 첨예하게 다르다. 대학병원도 빅5 이냐 아니냐에 따라 다르다.

의사들의 이해관계가 달라 집단행동을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큰 임팩트를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부는 파업을 해도 의사들만 욕먹고 끝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별로 괘념치 않을 것이다.

 

 

그 누구도

지금 의대 교육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학생 교육은 핵심이 되지 못한다.

그들이 곧 우리의 후배가 되어 의사가 될텐데 말이다.

학생 교육에 있어서는 개원가보다는 대학병원의 책임이 크다.

지금 대학병원은

병원 생존을 위해

정부가 제시한 약간의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부가사업을 어떻게 할 것인지, 장례식장을 어떻게 키우고 화장품 회사와 어떻게 조인할 것인지 고민할 것이다.

 

그런 미래에서

우리 학생들에게 좋은 의사란 어떤 의사인지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

 

나도 할 말이 없다.

대학병원에서 선생으로 일했던 사람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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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unior staff 2013.12.30 08:51

    선생님... 댓글은 처음 남기지만 오래전 청년의사에 글 남기던 시점부터 선생님 글을 매우 좋아하는 후배의사입니다.(의대학번은 제가 높겠으나...) 의대교수의 덕목은 CARE(clinic, assignments, research, education)라고 생각하는데 병원에선 clinic, 학교에선 research, 선배의사들은 assignment(잡일 또는 보직)에 대한 과도한 압력을 받고있지만 학생과 전공의 교육만큼은 매일 조금씩 시간내서 확보하려고 노력중인 젊은 의사입니다.
    Big5가 아니다보니 저희 과의 staff은 모두 다섯인데, 정교수 2분, 부교수 2분, 조교수인 저 하나, 이렇게 임상조교수나 fellow없이 몇 년 버티다보니 학교에서 요구하는 논문실적까지 채우려면 fellow4년을 포함하여 몇년째 평일에는 밤12시 전에 집에 거의 들어가지 못하는 삶을 살고있고,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러더라도 선생님 글처럼 제 현실보단 의대교육의 문제가 더 심각하게 생각되는 의사 중 한 명입니다.
    이러한 글이 무언가 의사사회에 적게나마 파장을 일으킬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누구도 아닌 나역시 언젠가 그에대한 책임을 져야할 의대교수이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facebook 공유도 하였습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1. BlogIcon 이수현 슬기엄마 2013.12.30 13:21 신고

      파장은요... 그런거 기대 할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저도 이제 더 이상 내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말할 수 있는건지 모르겠습니다. 좀 비겁하죠. 있을 때 잘해야하는건데 ㅠㅠ
      제가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대안도 없고 갑갑하고 나는 너무 지치고 그런 상황 아닐까요?
      특별한 일이 없어도 12시 전에 집에 들어간 적이 없는 생활...
      그래도 욕심이 있으면, 꿈이 있으면, 악착같이 하고 살 수 있는데
      과연 그럴만큼 꿈과 욕심이 뭘까 생각해 보면 인생이 참 아스라 해집니다.
      저도 그만두게 되었지만
      나가는 그 날까지는 이렇게 바쁜 생활을 할 것입니다. 이것저것 너무너무 일이 많으니까요.
      아무도 모르죠.
      도대체 왜 저렇게 사는지...
      그러니까
      순간순간 삶의 exit를 찾으시고
      꼭 행복하게 사세요.
      저도 행복하게 살라구요. 하고 싶은거 하면서 밤 새면서 행복한 일을 찾아...

  • 근영아빠 2013.12.31 02:13

    답장도 남겨주셨네요.
    1. 뭐 몇몇 사람들 마음의 파장도 중요하니까요... 지금까지 잘 해오셨습니다. 선생님처럼도 못하는 의사들이 대부분이니까요... 학생수업에 일차의료에 정작 필요한 내용이 아닌 전문의 수준의 학회 강의록들 짜집기해서 만든 엄청난 양의 강의슬라이드를 모두 중요하다 강조하는 교수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학생들이 알아야 할 중요한 것들 하나하나 정성들여 만들어서 하는 강의가 진짜이지요.
    2. 저는 적어도 경제적인 욕심, 쉬고싶은 욕심 정도는 크지 않아서 학교에 남을 수 있었습니다. 학교를 떠나면 결코 할 수 없는 것들... 내 양심대로의 진료만 해도 논문실적이 모자라거나 학교명예를 실추하는 일만 없으면 짤리지는 않을, 공부하고싶을 때 공부하고 논문 쓸, 국내외학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할 수 있고, 좀 어려운 환자 고민하면서 이런저런 검사를 통해 final decision을 할 수 있고, 전공의/학생들과 늘 가까이서 가르치며 새로움을 공유하고픈 욕심 정도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디 시골 조그마한 도시라도 대학병원이라면 그러한 걸 유지할 수 있겠단 소박한 욕심이지요.
    3. 나름 주말엔 가족들과 ventilation을 하고 살고있고, 그리 악착같은 성격은 못됩니다만 조언 감사드리고, 선생님도 늘 건승하시길 기원합니다..

  • 펠로우 2014.01.01 00:33

    이제 취직을 준비하고 있는 펠로우 2년차입니다. 교수님의 글을 읽다보니 저처럼 변화가 생기실 해 인가봅니다. 저는 제분야에서 제일 잘 아는 사람중의 하나가 되어보고자 펠로우를 결심했었는데, 조금 일찍 포기하고 나오려고 합니다. 변화를 앞둔 시점에 불안감 착잡함 후련함 해방감이 뒤섞인 연말을 맞이하고 있는데 선생님 또한 그러실것 같아요. 힘내세요. 항상 응원하고 있습니다.

  • 2014.01.05 06:10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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