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2 - Transition 2014-2015/가운을 벗고 사회로 나오다 0.5

환자의 가족이 되어

이수현 슬기엄마 2014. 5. 21. 02:02

누구나 환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환자의 가족이 될 수 있다.


내가 만난 수많은 환자들은 나에게는 그저 비슷한 진단명을 가진 한명의 환자에 불과했지만

그들 가족의 소중한 그 누구였다.

물론 나는 그런 맥락을 잘 이해하고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가족의 애타는 심정을 내 마음에 담아두고 환자를 진료하는 않았다. 


첫째, 그렇게 환자를 보면 너무 지치고 힘들다. 그래서 의사생활 오래 못한다. 

(그러나 모든 환자는 의사가 자신을 그렇게 가까운 피붙이처럼 진료해 주기를 바란다.)

둘째, 가족을 진료한다해도 그렇게 애타는 심정을 갖지 않는다. 

(정식으로 가운입고 병원에서 진료를 하면, 가족이라 해도 그렇게 감정이입을 잘 안하게 되는 것 같다.)


이런 핑게를 대면서 

적당히 가벼운 마음으로 본다. 

나의 진심이 필요한 순간에도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을 스스로에게 하며 

감정이입 안하고 거리두기를 유지하였다. 

내키면 어떤 환자에게는 잘 대해준 순간도 있었겠지만, 대체적으로 썰렁하게 진료하기 쉬워진다. 

환자들은 그런 내가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특히나

암처럼 절대절명의 심각한 병을 진단받은 환자들에게는 

진심을 담아 희망과 용기를 주는게 필요한데

지금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의 언행이 다소 피상적이었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엊그제 

뇌하수체 종양을 진단받은 엄마에게

처음으로 진단명을 알려주고 

앞으로 추가적인 검사와 예상되는 수술 및 치료에 대해 얘기해주고

예후에 대해서도 얘기해 주었다. 

수술 이후 장기적으로 각종 호르몬제를 다 먹어야 한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내 몸의 호르몬을 매일 먹으면서 조절해야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귀찮은 일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술보다도 더 걱정되기도 하고 그랬다. 호르몬의 자가조절능력이 없이 외부에서 인위적으로 공급해 주는 것은 몸 컨디션을 잘 맞춰주지 못할 것 같다. 

수술 합병증에 대해서도 별로 설명하지 않았다.

우스개처럼 수술 후 뇌압이 올라가면 안되니까 똥도 힘주고 싸면 안된다는 말만 썰렁하게 해준것 같다. 

수술 자체의 합병증도 있지만 

나이가 있으니 그렇게 누워지내는 동안 근육양도 줄어들고 기력도 많이 쇠해질 것 같다. 그런 얘기를 미리 해주고 싶지 않았다. 

좀 좋게 얘기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겉으로는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내 속으로는 오만 생각을 다 하고 있다.

아마도 내 표정에는 그런 이중적인 나의 심정이 다 드러났을 것이다. 




병원 예약을 잡기도 전에

슬기 시험 시간표, 내 일정, 그런 것부터 챙긴다.

집안일 도와주는 일하는 아주머니를 매일 오시게 해야 할 것 같아 

도우미 아줌마 구인광고 싸이트를 뒤져본다. 

엄마는 수술을 하게 되면 집안 정리를 좀 해놓고 가야 할 것 같다며 장롱 옷장정리부터 하신다.

혹시 잘못되면 죽을지도 모르니 신변 정리를 잘 해놔야 죽어서 창피 안당할 거라며 농담처럼 웃으면서 말씀하시지만 아무도 웃지 못한다. 

수술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어떻게 수술 후 회복을 도와드려야 할지, 입원은  몇일이나 하게 될지, 갑자기 고민할 게 많아진다. 

슬기랑 상의한다. 입맛이 까다로운 슬기의 입단속을 한다. 할머니 없으니 혼자서도 잘 챙겨먹고 아무거나 좀 먹어라. 다음주에 학회에 갈 예정인데 학회를 취소해야 하나 비행기부터 숙소까지 다 예약을 했는데... 위약금 내고 취소해야 하나. 그러고보니 병원비도 많이 들겠네. 통장에 돈은 좀 있나? 

솔직히 그런 실생활과 관련된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것은

엄마에 대한 걱정이다. 

담당 의사 선생님께 '이분은 세상에서 나에게 가장 특별한 분이니 꼭 좀 부탁드린다'는 그런 말이 목젖까지 차오른다. 환자를 볼 때 보호자가 그런 말 하면 왠지 부담스럽고 짜증도 나고 그랬는데, 나도 영락없이 그런 보호자가 될 참이다. 


그냥 엄마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날 것 같다.

엄마없으면 못살거 같은데 

그런 생각만 든다.  

수술 후 회복을 잘 못하면 어떻게 하나 

그런 하나마나한 걱정도 많이 된다.

엄마가 아프면 아빠는 어떻게 하나.



그동안 건강한 줄만 알았던 부모님 건강에 빨간 불이 들어오니

온통 마음이 혼란스럽다.

겉으로 일을 하고 있어도 실상 영혼이 없는 껍데기 같은 몸뚱이만 시간을 때우고 있는 것 같다.



  

열심히 치료해도 완치될 거라는 보장이 없는 

전이성 암환자들을 진료하면서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 환자와 가족들을 만났다.

그들은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 

힘들지 않게 병원에 오는 일,

약 먹고 부작용이 생기지 않게 몸 상태를 잘 맞추는 일, 

한끼 한끼 음식을 잘 먹는 일, 

가능하면 가족 대소사에 환자가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일, 

너무 먼 미래를 계획하기 보다는 당장 이번주, 이번달, 별일 없이 넘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평온하게 암치료를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내가 모르는 많은 갈등과 고민이 있었겠지만 

겉으로는 쿨하게 잘 지내려고 노력한다. 

너무 걱정을 많이 하고 감정기복이 심한 가족보다는 

이런 가족이 훨씬 더 삶의 질도 좋고 평안한 일상이 유지되었다. 그것이 환자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환자 상태가 나빠져도 가족의 사랑이 계속 되었다. 오늘 하루가 선물이라는 것을 삶으로 체험하는 이들이다. 

누구나 

처음 겪기 마련인 큰 병 앞에서

평소 갈고 닦았던 내공이 나오나 보다. 




지금의 나는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가 아니니 

새삼 결심한다 해도 내 과거의 허물을 보상할 길이 없다.

이제 환자의 입장, 환자 가족의 입장에서 의료를 바라볼 때인가 보다. 

대학병원 의사의 삶이 어떤지 뻔히 알면서도 진료실에서 의사선생님의 친절한 한마디, 나를 잘 돌봐줄 것 같은 자상한 한마디를 기대하게 된다. 

그것을 어쩔 수 없는 환자의 마음이다. 

그 마음에 대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면

좋은 의사가 될 것이다. 

여러 모로 힘든 제도와 조건이지만  

의사는 결국 의사의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이 의사의 숙명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