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레지던트일기

회식에 대한 단상

이수현 슬기엄마 2011. 3. 1. 18:13

회식에 대한 단상

 

나는 지금 병원에서 일하기 전, 회사라는 공적 영역에서 월급 받고 근무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회식이라는 말을 별로 들어본 일이 없다. 학생이나 인턴 때도 회식은 나와 별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내과 소속이 되고 난 이후, 회식이 단지 밥만 먹는 자리는 아니라는 것, 때로는 매우 부담스러운 자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물론 내과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

레지던트는 2개월을 전후로 part가 바뀌기 때문에 적응할 만하면 보따리를 싸서 이동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Term change를 전후로 며칠 동안은 새로운 일에 적응해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새로운 파트, 혹은 파견병원의 첫 며칠은 참으로 힘들고 실수투성이이기 때문에, 윗분들께 혼나기 일쑤다. 윗년차 혹은 교수님 눈 마주치는 일조차 어렵다. 그만큼 내 안에 켕기는 것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실수도 많고 켕기는 일도 많고 자신감도 없다 보니 저 멀리서 교수님이나 윗년차 선생님이 보이면 길을 돌아가버리는 등의 비겁한 행동도 한다
.

그렇게 병원 생활을 하다가 회식자리가 생기면 가 봤자 마음만 불편할 것 같아 뭔가 핑계를 대고 빠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대개의 회식은 내 마음대로 가고 말고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이 몇 시까지 오실 예정이니 레지던트들은 하던 일을 중단하고서라도 미리 자리를 채우는 것이 예의다. 물론 회식이 있는 날은 미리미리 일 처리를 해 놓아야 하지만 오후에 신환이 대거 입원을 한다거나 일이 많아 미처 마무리가 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병원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 회식도시간 엄수가 중요하기 때문에 하던 일을 중단하고 가운을 벗어 던지고 마구 뛰어야 한다. 회식장소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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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차 초반 멋모르던 시절, 나는 어떤 회식에서 별 거리낌없이 내가 앞으로 어떤 분야를 전공하고 싶은지, 그 분야에 대한 내 생각은 어떤지를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한 윗년차가 다음날 병동에서 나의 지지부진한 일 처리에 대해 혼을 내면서 이런 식으로 일하는 게 당신이 하고 싶은 분야의 특징이냐고 면박을 줄 때, 나는 앞으로는 회식에 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라 결심한 적도 있었다
.

회식은 아무래도 병원에서의 긴장을 풀고 인간적인 이야기도 나누면서 서로간의 친목(!)을 다질 수 있는 기회가 되겠지만, 인간적인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처럼 나이가 많은 사람은, 왜 동기에 비해 나이가 많냐, 의대는 왜 왔냐, 결혼은 했냐, 애는 있냐, 집안일 하랴 병원일 하랴 힘들지는 않냐 등의 질문을 회식 때마다 당하게 된다. 별로 감출 것도 자랑스러운 것도 없지만 약간 특이한 존재가 되어 비슷한 대답을 하다 보면 사실 마음이 허탈하다. 내가 속한 집단에서 나는 이런 pattern으로만 질문 당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 싶어서
….

나에 대한 우호적인 마음으로 궁금해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를 평가하는 날카로운 시선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도 은연 중 깨닫게 되었다
.

또한 내가 살면서 얼마나 깊이 마음을 열어놓고 사나, 얼마나 진지하게 살고 있나 별로 자신도 없고 늘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지만, 회식의 많은 시간이 겉도는 이야기들로 채워진다는 느낌도 받는다. 나는 그저 자리를 채우고 있다는 생각,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대화를 주도할 만한 능력도 없다는 생각, 바쁘고 힘들고 졸린데 그 자리를 지키고만 있다는 느낌이 들 때면 참 내가 한심하다
.

나는 서너 명이 모여 수다를 떨면서 서로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그에 대해 마음껏 비판하고(만약 더 친하다면) 비난도 서슴없이 퍼부을 수 있는 그런 왁자지껄한 술자리가 좋은데, 그 이상의 자리로 확장되면 적응을 잘 하지 못하는 것 같다
.

지난 주처럼 Term change 주간에는 선생님들도 그 동안 수고한 전공의들에게 회식 자리를 마련해 주시는데 그것이 이리 저리 겹쳐 3~4일 회식이 연속되면 몸은 몸대로 피곤하고 마음도 공허해진다. 공허해하는 내가 다소 병적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

내가 인턴 때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울려대는 call의 대부분은 1년차의 order가 인턴의 업무를 지시하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한 과의 모든 레지던트, 인턴이 같이 점심을 먹는다는 모 병원의 시스템이 참 부러웠다. 굳이 특정한 날에 모여 어색함을 풀고 인간미를 느끼기보다는 일상적으로 매일밥을 같이 먹는다는 행위가 서로간에 더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여유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

어떨 때는 회식에서 먹는 음식 자체가 매우 부담스럽다. 평소에 내가 먹고 사는 음식보다 훨씬 비싼 음식을 먹을 때면 우리가 십시일반해서 내는 돈도 아니고 어딘가 출처가 있을 텐데, 과연 우리가 한끼 먹는 식사에 이렇게 돈을 많이 써도 되나 싶은 아줌마 근성이 나온다. 또 이렇게 쓸 돈이 있다면 먹는 것에는 돈을 좀 덜 쓰고 다른 일이 쓰면 안 되나 하는안티 근성도 나온다


밥만 먹는 회식도 있지만, 술이 동반된 회식은 회식 후반부의 분위기가 평상시 통제 가능한 상황을 넘어서기도 한다. 내가 직접 경험한 적은 없지만 여자 의사가 별로 없는 과에서는 성추행이나 언어적 성폭행이 오가기도 한다. 이렇게 망가지면서 술을 마셔야 친해지게 되는 것일까 싶게 많이 마시기도 한다. 물론 아무리 마셔도 다음날 회진준비에 차질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여러 유형의 한계상황이 오겠지만 억지로 술 먹고 또 그 술기운을 이겨내며 다음날 병원일을 해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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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초, 내과 입국식에 가서 1년차들이 술을 많이 마시고 일종의 신고식처럼 자기 소개를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술자리가 시작된 지 1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이미 발음이 꼬이고 소리를 꽥꽥 지르며열심히 하겠습니다를 외치는 모양이 내가 90년에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때의 신입생 환영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더 구식이었다. 이것이 과연 우리에게 통과의례의 의미가 있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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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많아 이것저것 쓸데없이 불만이 많아졌나 보다. 내가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한계를 괜히 외부로 투사한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좀 더 cool하게 지낼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고 싶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늘 명백하게 구분되는 삶을 살 수는 없지만 적당한 거리감과 예의, 그리고 서로에 대한 애정이 좀더 자연스럽게 관계맺음할 수 있는 병원문화가 만들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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