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레지던트일기

Even if I Don’t Know What I’m Doing

이수현 슬기엄마 2011. 3. 1. 18:25

Even if I Don’t Know What I’m Doing

 

우리 병원은 지난 주부터 4년차 레지던트들이 전문의 시험 공부를 위해 환자 진료에서 한걸음 물러나고 3년차들로 책임 업무가 넘어오게 되었다. Subspecialty를 정하는 과정에서 이리 저리 마음 휩쓸리고 감정 소모도 많았는데, 마음을 다잡을 여유도 없이 한 파트의 치프가 되어 순식간에 중차대한, 그리고 상당히 다양한 종류의 잡일까지도 해결해야 하는 만능일꾼으로 변할 것을 요구한다.
일 하는 건 그렇다 치자
.
학생 실습 때 몇 번 발표해 본 이후로 공식적인 발표를 해 볼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갑자기 내가 담당해야 하는 저널 발표나 conference가 많아진다. 준비할 시간이 별로 없다 해도 언제든 발표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치프가 되어 연차는 올라갔지만 발표 능력과 요령은 급격히 저하되어 학생보다 더 똑똑하지 못한 것 같다. 나의 어리버리한 표정에 나도 놀랄 지경이다
.
다른 과와 함께 하는 공통 세미나도 많아지고 내가 모르거나 내가 관심을 갖지 않았던 - 사실은 별로 갖고 싶지도 않은 - 주제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논문 읽고 발표하는 일들이 급증한다
.
심지어땜빵도 많다. 갑작스러운 대진이나 발표, 원고 작성에 동원되는 것이다. 지금은 배워야 할 때이나, 주제나 흥미도에 상관없이뭐든지 열심히 하자주의는 금물이다. 그것은 매우 생산성 없이 24시간을 보내며 나를 소모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요령껏 눈치 있게, 나에게 꼭 필요한 일들을 우선순위로 삼아 시간을 효율적으로 배분할 줄 알아야 한다. 얄미운 이들은 논문 쓰는 일을 알뜰하게 챙긴다. 남는 건 논문 뿐이라며….

백조의 모습으로 살기 위해서
가장 당황스러운 일은 내가 치프이니, 뭐든 물어보면 대답이 튀어나올 것으로 기대한다는 점이다(사실은 내가 무식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렇게 대하는 것 같다). 다른 과에서 뭔가를 물어오면 아주 겸손한 사람인 것처럼, “제가 확실하게 잘 모르겠으니, evidence를 찾아서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사실은저는 하나도 모르거든요. 왜 자꾸 그런 걸 저에게 물어보시나요?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찾아보고 확인 받아야 한다구요라고 마음속으로 외친다. 교수님들도그래서 자네 생각은 어떤가?”라고 질문한다. 내 생각을 준비해서 뭔가를 말하기 위해서는, 백조가 물 위에 우아하게 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물 속에서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것처럼, 엄청나게 몸과 마음을 굴려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처럼 저널을 발표하는 날이면, 발표를 마치고 나서 마음이 매우 허탈하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데, 마치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태연스럽게 말해야 한다. 잘 모르는 부분은 빠르게 읽고 슬라이드를 넘긴다
.
질문은 적당히 피하고, 마치 다른 질문을 받은 것처럼 엉뚱한 소리를 하곤 한다. 사실은 잘 몰라서 딴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데 말이다.

소프트웨어의 변화와 수련의 제도화
지난 여름 우리 병원은 JCI(Joint Commission International)라는 국제적 수준의 의료기관 평가를 받았다. 우리의 실제 수준과 그 평가의 기준을 맞추기 위한 급격한 변화의 허실을 경험하며 착잡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진료 및 병원 운영의 표준화(standardization)가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라는 점에 동의할 수 있다. 또 우리 자체적인 노력으로 변화하기 힘든 부분이 외부의 강제적인 힘에 의해 규정되고 변화한다는 사실이 씁쓸하지만, 변화의 방향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 변화를 거치며 대학병원 진료의 큰 역할을 담당하는 전공의 수련과 교육에 관한 부분은 강조되지 않았다. ‘레지던트쯤 되면 누가 가르쳐 줘서 공부하나, 스스로 알아서 책 찾아보고 공부하는 거지?’라고 반박할 법하다. 그러나 시대가 요구하는 기준은개인의 의지로 문제를 극복하는 것 보다는표준화된 제도에 진입하면 표준화된 실력과 술기와 질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매일 매일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극기적인 힘을 발휘하고 발을 동동 굴리다가 헛발질을 하지 않도록, 속도가 다소 못 미치더라도 차근차근 교육하고 기본을 연마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의 변화가 하드웨어의 변화와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
평가가 끝나니 긴장감이 떨어진 탓일까? 소프트웨어의 변화를 위한 노력은 발견하기 어렵다. 전공의 자체적으로 아래로부터 요구하는 것도 없고, 위에서 강제적으로 지시하는 내용도 없다
.
교육이나 수련의 문제 개선이라는 주제 자체가 가시적인 변화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고용량 스테로이드 요법을 써서라도
병원 생활이라는 것이 몇 개의 순환 고리가 얽혀 있어 비슷한 주기를 반복하는 듯하다가, 정신 차리고 보면 다른 회전 고리의 공전 궤도에 진입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새로운 고리에 처음 진입할 때는 초 긴장감으로 스테로이드 호르몬을 왕창 소모하게 된다.
함께 순환 고리를 통과하고 있는 동기들과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살다간 relative adrenal insufficiency 로 기운 없고 의욕 없어 physiologic dose steroid hormone을 복용하여 50대가 넘어 동문회를 하면 모두 쿠싱이 되어 만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며 농담한다. 하지만 요즘 같으면 high-dose steroid replacement 라도 해서 뭔가 강력한 힘을 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
콩나물 시루에 물을 주면 물이 줄줄 새면서도 어느새 콩나물이 자라 있는 것처럼, 뭔가를 머리에 집어넣어도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하며 좌절감을 느끼면서도 의대를 무사히 졸업한 것처럼, 아는 것도 부족하고 환자도 제대로 못 보며 좌절감의 연속으로 1년을 보냈지만 지금 3년차가 되어 있는 것처럼, 치프가 되어 맞이하는 한 해를 또 마칠 무렵이면, 스스로에게 수고했다며 박수를 보낼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의욕이 있으면 좋겠다
1 2 3 4 5 6 7 ··· 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