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을 치료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왜 좋은 의사가 되지 못하는가

 

먹을 수 없는 그림의 떡만 많아진다

 

모든 학문이 그렇겠지만 종양학은 유독 발전의 속도가 매우 빠르고 변화가 많은 것 같다. 분자유전학의 발전으로 실험 및 검사 기법이 고도화되고 이를 학문 발전의 원동력 삼아 엄청난 논문들이 쏟아지고 있다. 이러한 자연과학과 기초의학의 지식 및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지금 이 시간에도 수천종의 신약이 개발되고 있고 그 중 극소수의 약이 살아남아 환자 진료에 사용되는 과정을 밟을 수 있다. 초기 약 개발 및 실험비, 관련된 연구비 뿐만 아니라 개발된 약으로 진행하는 임상시험과 관련된 비용이나 홍보비 등 다양한 제반 비용 모두가 궁극적으로 약값에 포함될 것이므로, 환자 진료에 사용될 정도로 살아남는 신약은 엄청나게 고가의 약제로 탄생되지 않을 수 없다. 최근들어 종양학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규모의 3상 연구를 몇차례 진행하여 신약으로서의 효능과 효과에 대해 확정적인 데이터를 제시하는 좋은 약들이 많이 개발되었다. 다른 제반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환자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쓰는게 좋은 약들이 많아졌다는 것은 정말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지가 모두에게 유용한 것은 아니다. 사보험으로 자기 진료수준이 결정되는 외국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나라도 국민건강보험에서 포괄하지 못하는 신약들은 결국 환자가 한달에 수백만원이 되는 약제 비용을 직접 지불하며 치료를 받아야 한다.

물론 이런 비용까지 모두 국가에게 지불하라고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것에 백퍼센트 동의한다. 그러나 비용 효과를 고려하여 환자에게 매우 확실하게 도움이 되는 약제가 있다면, 국민건강보험으로 이를 커버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될 것이다. 예를 들자면 암환자의 진료비 비용부담을 5%로 낮추는 것을 들어보자. 혜택의 범위를 확대하여 2만원 낼 것을 1만원 내는 것으로 진료를 경감시켜주는 것은 혜택의 양과 범위를 넓히는 데에는 도움이 되고 정부로서 생색내기에는 좋겠지만, 실재로 절박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인구집단을 선정하고 그들을 타겟으로 하여 양질의 의료를 제공하는 기회는 제공하지 못할 것이다. 여전히 우리나라 대부분의 중산층은 신약을 써볼 기회를 갖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매체를 통해 신약 관련 정보들이 오인되는 경우도 많다. 아주 환상적인 효과를 갖는 신약이 개발된 것처럼 대중매체에서 홍보되지만 정작 기존 약제에 비해 생존률 향상의 정도가 그다지 높지 않은 약들도 꽤 많다. 기존의 약보다 1.5개월 생존기간을 연장시키는 것을 통계적으로 입증한 논문이 나오면, 종양학 의사들끼리는 괜찮은 결과가 나왔네. 효과가 좀 있나보지?’ 이 정도 생각하고 말 정도의 내용인데, 이것이 대중매체를 통해 어떻게 포장이 되었는지, 마치 이 약을 쓰면 안 나을 병도 낫고, 형편이 어려워서 쓰지 못하면 치료가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여 아주 절망하는 환자들이 있다.

그래서 환자에게 신약을 한번 써보자고 권할 때 종양내과 의사의 머리와 마음 속에는 오만 생각이 지나가고 많은 판단을 하게 된다. 환자들이 어디선가 입수한 정보를 들고 와서 자신에게 이 약이 해당되는지를 문의하면 그의 행색을 살펴 지갑두께를 짐작해야 한다. 기대치가 얼마나 되는지도 정확히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잘못 말하면 환자가 너무 절망하기 때문이다. 돈없어서 좋은 약도 못 써보고 나빠지는 거라는 생각, 신약을 썼다하면 자신의 병이 아주 많이 좋아질거라는 기대수준까지도 잘 파악해서 환자가 상처받지 않게, 그러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치료에 임할 수 있게 섬세한 눈치작전을 펼쳐 진료에 임해야 한다. 만약 신약의 존재 자체를 미리 설명해주지 않으면, 자신에게 왜 그러한 설명을 하지 않았느냐며, 자신에게 가능한 선택지를 의사가 미리 지레짐작으로 앗아가버린 것 아니냐는 항의를 강하게 할 것만 같은 환자들도 미리 분류해 놓아야 한다. 그러므로 적절한 환자 진료를 위해 의사가 갖추어야 하는 덕목에는 실력과 심도깊은 지식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의료환경에서 제한된 조건 하에서 최선책은 못되더라도 2-3가지 종류의 다른 차선책까지 준비해 놓으며 진료에 임해야 하는 능력이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일단 환자를 나쁘게 한 다음에 좋은 약을 쓸 것

 

모든 신약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정말 획기적으로 좋은 약이 개발되어 기존의 치료법을 뒤집는 경우가 있다. ‘좋은 약’이란 대개 기존의 약보다 효능이 뛰어나거나 아니면 약의 부작용을 획기적으로 감소시키는 경우로 구분될 수 있다. 그런 ‘좋은 약’들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까지는 시간적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 약을 사용하는 초기 단계에서는 해당 약제를 포함한 임상연구를 진행하거나 사용의 폭을 넓히거나 아니면 환자가 약에 대한 비용 부담을 전액 감당해야 한다. 더 이상 치료적 대안이 없어 의사가 마지막 카드처럼 ‘이 약이 보험은 안 되지만 한번 써보시겠어요?’라는 제안을 할 때 환자들은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비보험 약제 사용 동의서에 서명을 한다.
나도 그런 설명을 해야 할 때가 있는데, 사실 그 약제가 탁월하게 좋은 약이었다면 왜 진작 제안하지 않았겠는가? 표준적인 치료에 별 효과가 없을 때, 큰 효과를 기대하지는 못하더라도 다른 대안이 없으니까, 혹은 뭐라도 해야 하니까, 망설이다 제안하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돈을 좀 더 내더라도, 치료만 될 수 있다면 어떤 희생이라도 각오한 사람들 아닌가, 좀 비싸면 어떤가, 환자에게 도움이 될 게 확실한데 뭘 망설인단 말인가’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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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개발이 어렵다는 ‘좋은 약’이 막상 출시되어, 여러 논문에서 입증되고 여러 나라에서 해당 약제를 사용하면서 치료를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보험이 안 되어서, 혹은 임의 비급여 논란이 무서워서 환자에게 해로울 게 뻔한 약제로 치료를 한다면, 이는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런 치료를 지금도 하고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예를 들면 면역력이 급격히 감소된 혈액 질환 환자들에서 진균 감염이 의심될 때 우리나라 보험에서 허가된 약은 암포테리신(amphotericin)이라는 항진균제인데, 나 개인적으로는 -아마 많은 혈액종양내과 의사 선생님들도 - 이 약을 매우 싫어한다. 이 약은 다른 항진균제에 비해 아스퍼질러스(Aspergillus)라는 균주를 더 커버한다는 장점이 있는데, 아스퍼질러스(Aspergillus)는 다른 진균들에 비해 치명적인 독성이 강해 환자의 생명에 위협을 줄 수 있다. 그래서 어떤 환자가 항진균제를 써야 할 정도의 상황이라면 결국 아스퍼질러스 균주를 커버하는 것이 필요하고 결국 암포테리신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약을 며칠 쓰다보면 거의 100% 신장기능이 악화되고, 이 주사를 맞는 수시간 내내 환자가 투약 자체를 매우 힘들어 한다. 약을 맞는 것 자체가 중장기적으로 환자에게 주는 고통이 크기 때문에 환자를 지켜보는 의사도 매우 힘들다. 항진균제를 써야 할 정도의 컨디션이라면 환자들은 전반적으로 체력이 매우 약해져 있고, 못 먹고 기운없고 다른 항생제나 항바이러스제까지 같이 투여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거기다 덧붙여 암포테리신이라는 어마어마한 독성을 갖고 있는 약을 쓴다는 건 의사로서 정말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국제적인 감염학회에서는 이 암포테리신이라는 약제를 환자에게 더 이상 쓰지 말아야 하는 약으로, 심지어 환자에게 해로운 약으로 분류하였고, 이 약제의 독성을 완화시킬 수 있는  제형으로 변형하여 제조한 암포테리신-B(amphotericin B)나 보리코나졸(voricornazole)이라는 항진균제가 효과면이나 독성면에서 첫 번째로 선택할 수 있는 약임을 제안하고 있다. 이는 모두 우리나라에서 처방 가능한 약제이다. 그러나 현재 이들 약제는 보험규정이 매우 까다로워 대개 암포테리신을 쓰다가 신장기능이 정상보다 몇 배 이상 나빠져야 2차 약제로 사용할 수 있고, 그나마 100% 환자가 비용부담을 해야 한다. 콩팥 수치가 나빠지기 전에 임의비급여로 쓸 경우 5년 내로 환자가 소송을 제기하면 그건 병원이 환급해줘야 할 수도 있다. 환자가 약값에 대한 비용부담을 하는 건 마찬가지더라도 임의비급여로 미리 쓰면 불볍진료가 되고 환자의 콩팥기능을 나쁘게 한 다음에 쓰는 것이 법적으로 허용되는 실정이다. 이런 사실을 환자들에게 설명하면 환자나 가족들은 통탄할 노릇이다. 다들 어이없어 하면서도 결국 치료를 하는 주치의에게 자신의 몸을 맡길 수밖에 없다. 이렇게 환자 몸을 나쁘게 한 다음에 더 좋은 약으로 치료하는 것은 무슨 경우란 말인가
!
비단 이 약제 하나만이 아니다. 경합하는 약 중에 성적이 조금 낫기 때문에 써볼 수 있다는 차원을 넘어, 정말 ‘좋은 약’들이 있다. 그런 약을 다 쓰게 해달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보건의료자원에 대한 경제학적 관점에서 볼 때 별로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다만 사람이 살고 죽을 수 있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경제학적 관점을 넘어 고려해야 할 약제들이 몇 가지 있으며, 이들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사용을 허가해 주어야 한다. 굳이 다 보험으로 처리해 달라고까지 요구하지는 않겠다. 의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약을 환자와 보호자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이에 동의하여 환자가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하면 쓸 수는 있게 해줘야 하지 않는가! 그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의사의 전문성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왜 이렇게까지 의사의 결정이 존중되지 못하고 의사의 전문성이 인정받지 못하는가? 전문가로서의 의사의 발언이 존중받지 못하게 된 데에는 특별한 역사적, 사회적 배경이 있는 것인가? 의사가 뭔가를 주장할 때 이를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 더 이상 의사는 사람들의 일상공간에서 만나기 힘든 존재도 아니고, 신호등이 있는 사거리 사방팔방에 편의점보다 많은 게 병의원인 시대가 되었다. 그만큼 의사의 취약점이 쉽게 노출되고 단점이 인구에 회자되기도 쉽다. 의사 집단의 자정능력이 취약하기 때문에, 누군가 이상한 진료를 해도, 적절한 기준에 맞지 않는 검사나 치료를 해도, 의사들 간에 이를 논의하고 비판하고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슬며시 피해가는 경향이 있다. 훗날 별 탈 없으려면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소극적으로 대처한다.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회피하는 방식이다. 정녕 한 직업진단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쉽게 형성되는 게 아닌가 보다.

얼마 전 병원에서 특정 약품을 임의비급여로 사용하는 일을 막기 위해, 미리 사전신청서를 작성하여 심평원에 요청해 100% 환자 부담으로 약품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기 위한 서류를 준비하였다. 보험심사과의 요청으로 몇 번이나 서류를 다시 준비하고, 다른 과 교수님들과 심사위원들께 이런 약제를 써야하는 상황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설명하는 기회도 가졌다. 솔직히 그 과정이 너무 복잡하고 서류작업도 익숙지 않고 귀찮아서, 그 약을 차라리 안 쓰고 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아쉬울 것 없다, 보험도 안 되는 약인데 안 쓰면 그만이지…. 비싼 약을 써서 환자가 좋아져 퇴원할 때는 고맙다며 인사하지만 한 5년쯤 있다가 과잉치료라고 소송을 걸면, 그 환자를 치료한 의사는 더 이상 환자를 위해 약제나 더 좋은 치료를 고민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잘 해줘도 돈 많이 나오면 나중에 고소할 텐데 뭐….
엄청나게 다양한 신약들은 쏟아지고 있는데, 새로 나온 약을 다 쓰겠다고 나서면 보험재정이나 운영에 어려움이 있을 거라는 건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건 살고 죽는 약들이다. 효과가 조금 더 나은 그런 약이 아니라 생존에 절실한 약, 그런 약들은 의사의 판단과 전문성을 인정해서 요청을 받아들여주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엉뚱한 약이나 검사에 대해서는 보험 인정을 해주면서, 정작 필요한 검사와 약들을 비용부담을 이유로 사용을 허가하지 않는 걸 보면, 보험 재정에 대해서도 논의의 여지는 분명히 있다.

환자보기와 논문쓰기는 제로섬 게임인가

암환자를 진료하는 의사는 개업의로 일하기 보다는 2차 병원 이상의 큰 규모의 병원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 큰 병원에서는 시대적 대세가 된 ‘SCI 등재 저널에 논문내기가 의사들에게 중요한 과제로 부여된다. 비단 종양학 뿐만 아니라 웬만한 대학병원의 웬만한 과에서는 이제 SCI 합산 점수, 논문 편수 이런 양적인 데이터가 그 과의 실력 및 실적, 해당 개인의 실력 및 실적으로 대치되고 있고, 승진과 보너스 등의 인센티브 요인으로도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대다수의 의사들은 겉으로 차마 드러내지는 않아도, 논문 압박의 부담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소박한 관점에서의 논문쓰기란 일기와 같아서 꼭 대단한 사건이 없더라도 매일 꼬박꼬박 일기를 쓰듯이 논문을 쓰는 것이다. 놀지 않고 열심히 연구했다는 증거도 되고, 자신에게 심각한 결격 사유가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환자를 열심히 봤다는 사실은 객관적 기준으로 평가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논문이 훨씬 객관적인 평가기준으로 인정되기 좋다. 의과 대학에서 논문으로 교수임용 및 승진 기준을 강화한 것은 불과 3년을 전후하여 생긴 새로운 트렌드이고, 그전까지는 의사들 사이의 알음알음으로, 핵심 멤버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자기 사람을 선발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런 선발 관행에 비해 논문의 양과 질을 임용 및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훨씬 객관적이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학맥과 인맥이 인재등용의 보이지 않는 카르텔을 형성하여 패거리 문화를 공고히 하는 것보다는, 다수에게, 누구나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기준으로 논문업적을 제시하게 하여 공정하게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잣대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내 생활을 돌아보면 논문을 쓰거나 자료 및 아이디어를 정리할 시간이 너무나 없다. 내 능력의 탓도 있겠지만, 환자를 보면서 이상하거나 궁금한 것, 뭔가 환자를 위해 새로운 대안이 필요할 때 폭넓게 논문 및 자료를 찾고 이론적으로 제안된 대답들이 과연 현실적으로 얼마나 가능한지, 우리 병원에서 시행해 볼 수는 있는지, 환자에게 경제적으로 얼마나 부담이 되는지, 이런 것들을 알아보고 확인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린다. 드문 질환의 진단 및 치료, 치료에 반응이 없는 환자에 대한 접근, 정확한 진단이 되지 않은 채 나빠져 가는 환자에 대한 추가적인 진단 등의 난국에 봉착하면 마음이 활활 타오르면서 자료를 찾는다. 과연 이론적으로, 혹은 논문에서 제시한 자료들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이용 가능한 자료일까, 자신없어 하면서….
아침 회진을 바람처럼 돌고 지나가 버린 후에 의료진의 결정을 잘 이해하지 못한 환자와 보호자들을 대상으로 찬찬히 설명해 주어야 할 때, 환자 상태가 좋지 않은데 그동안 병의 경과와 치료경력을 미처 꼼꼼하게 파악하지 못한 주치의의 어설픈 설명에 화를 내며더 높은 의사의 설명을 듣겠다는 사람들을 만날 때, 여기저기 병동에 흩어져 있는 주치의들과 환자의 치료계획에 대해 상의하고 때론 그들이 던지는 질문에 답하느라 공부해야 할 때, 환자를 특별히 부탁해야 할 일이 있을 때나 타과 의사들과 논의하고 부탁해야 할 때, 협진 보러 갔다가 환자와 보호자가 설명을 요구하며 붙잡을 때, 응급실에서 처음 본 보호자가 나를 위협하며 불만을 토로할 때, 나의 시간은 참으로 부질없이, 순식간에 흘러가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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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 마음 속에는또 하루를 버렸구나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이렇게 바쁜 임상 현장에서 많이 경험하고 많이 고민하고 많이 공부하는 것이 장차 내가 평생 살아가야 할 이 분야에서 기초를 튼튼히 닦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대충할 때나에게 시간이 허락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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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보는 시간을 줄이면, 회진을 안 돌면, 환자에게 자세한 설명을 안 하면, 그제야 비로소 시간이 생긴다. 자기를 위한 시간을 만드는 것도 요령이고 실력이라고들 한다. 오후 회진을 안 돌거나 대충 일하면 나를 위한 뭔가를 조금씩 해낼 수 있다. 환자를 보며 허덕이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논문 좀 썼냐?”는 질문을 하기에좀 바빠서…”라고 대답했다가너 그렇게 논문 안 쓸 거면 나가서 환자나 봐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기도 했다. 아니, 나가서 환자나 봐!!!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
레지던트 3, 4년차부터 병동에서 환자를 보는 데 시간을 쓰는 것보다 데이터를 입력하고 SPSS를 돌리며 논문을 쓰고 subspecialty를 정하기 전부터 외국 저널에 좋은 논문을 내는 것에 집중하는 경향도 높아졌다. 내가 호감을 갖는 모 주니어 선생님께선생님, 그동안 논문 많이 쓰셨어요?” 했더니쓰레기 같은 논문 8개 써서 승진할 수 있게 되었어요라며 시니컬하게 쓴 웃음을 보낸다. 어쩌면 진짜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쓰레기를 재생산하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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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회학을 했던 가락이 있어서 논문을 찾고 거기서 아이디어를 내보고 흉내도 내면서 논문 쓰는 것이 그렇게 괴롭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정작 환자 진료와 논문쓰기의 시간이 충돌할 때는 논문이나 자료로 손이 잘 가지 않는다. 만약 내 실력이 여기까지고 더 이상 환자보기와 논문쓰기의 양팔 저울에서 균형을 찾지 못하고 헤매게 된다면, 난 아쉬울 것 없이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의 시대가 요구하는 능력 있는 개인이 되지 못한 채 낙오하겠지…. 하지만환자만보다 보면 분명히 재미가 없을 것 같다. 아마도, 어려운 케이스에 도전하고 다년간의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자료를 정리하면서 논문을 쓰는 학문적 유희를 그리워할 것이다. ‘제로썸 게임이 되지 않게 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왜 나는 환자에게 듣기 좋은 말을 잘 못해주는가?

원발 장기를 넘어 다른 장기로 암이 진행된 경우를 4기 암이라고 한다. 4기가 말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4기 암환자들은 치료를 하더라도 완치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일정 기간 동안 병이 조절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상태가 나빠진다. 수술, 항암치료, 방사선치료 등의 방법을 더 이상 시도하기 어려울 때, 막힌 곳에 스텐트를 넣고 관을 넣어 배액하고, 뭔가 환자를 힘들게 하는 상황을 조절하기 위해 시술을 해 보아도 통증이나 피로, 호흡곤란, 식욕부진 등의 증상이 조절되지 않을 때, 병원과 의사가 환자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을 때가 있다. 이미 환자와 보호자는 많은 고통으로 지쳐 있다. 거기에 대고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더 이상 해볼 수 있는 게 없습니다에 불과할 때, 의사로서 무기력하고 힘들다. 그런 환자들이 의사를 원망하고 떠나도 할 말이 없다. 그래서 그들이 무슨 주사를 한두 번 맞고 수백만원을 냈다는 둥, 어디 가서 뭘 해보면 효과가 있다고 하니 거기로 가보겠다는 둥의 말을 할 때 차마 나는 그들에게 별 말을 못하겠다. ‘내가 뭘 해주는 게 있어야 이들을 막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자조하면서….

명확한 건 그들이 잡는 지푸라기는 참 비싸다는 점이다. 비싼 지푸라기의 효과가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아도 그들은 지푸라기를 던진 사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절박한 그들을 위해 뭔가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푸라기를 던지는 사람 중에는 의사도 있고 한의사도 있다. 둘 다 아닌 무자격자도 있다. 그들은 그런 취지가 아니었고, 환자가 원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환자가 원해 죽기 전에 수백만원짜리 굿을 했다 해도 내가 뭐라 말하겠는가. 나는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그래도 뭔가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암 환자 한 명이 죽기 전에 지출하는 의료비는 얼마나 될까? 평생 냈다는 건강보험료와, 진단과 검사, 수술과 항암, 방사선치료 등 공적영역 의료에 지출한 진료비의 비중과 건강보조식품, 각종 보완대체요법, 암이나 각종 질병과 연관된 보험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지출하는 돈 등 사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건강추구행위에 지출한 비용을 모두 합치면 얼마나 될까? 어느 쪽의 비용이 더 많이 지출되고 있을까? 지출한 비용만큼 결과는 만족할 만한가? 사실 이런 분야에 대한 객관적인 데이터는 확실하지 않다. 암보험에 가입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치료 성적이나 생존율에 차이가 있을까? 각종 건강보조식품의 복용은 증상 완화 및 삶의 질 향상에 얼마만큼의 도움이 되는가? 그 모든 것들의 비용효과(cost-to-benefit)를 정확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내가 3년차 때 일이다. 4기 대장암으로 2주마다 한 번씩, 34일 동안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는 환자가 있었는데, 이번 입원 당시 Hb 9.0g/dl으로 경미한 빈혈이 있었다. 빈혈의 원인은 anemia of chronic disease, 즉 암 등의 만성질환이 있을 때 동반되는 빈혈이었고, 굳이 수혈을 할 필요는 없었다. 환자의 전신 상태를 고려할 때 항암치료를 하는 동안 target Hb 10g/dl 정도 유지하는 것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그리고 그것이 가이드라인이기 때문에), 난 수혈보다는 적혈구 생성촉진인자(erythropoietin)를 주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지난 처방을 보니 간헐적으로 이 주사를 맞고 있었기 때문에 별 고민 없이 처방을 했다.

그런데 퇴원 당일 환자가 병동 간호사실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화를 내고 있었다. 이유를 알아보니, 내가 처방한 적혈구 생성촉진인자가 보험이 안 되서 평소보다 10만원 정도를 더 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기가 맞겠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보험도 안 되는 약을 처방해서 돈 벌려고 하는 거냐며 화를 내는 중이었다. 나는 Hb 10.0g/dl 미만이면 보험이 되는 줄 알았는데, 이 환자가 최근에 수혈을 하고 나서 한 번 12.0g/dl으로 체크된 적이 있었고, 중간에 12.0g/dl이 넘으면 보험이 안 된다는 조항이 숨어 있었다. 환자 말대로 비보험 약제를 처방한 꼴이 되었다. 나는 좀 억울했지만, 환자 입장에서도 억울하겠다 싶었다.

문득 내 시야에 그의 진료비 영수증이 들어왔다. 23만원의 진료비를 지불하게 되어 있었다(본인 부담금만). 항암제 비용뿐만 아니라 23일 동안 문제없이 항암제가 투여될 수 있게 간호사들이 라운딩 돌고, 입맛 없다고 해서 영양제도 주고, 진통제 등 각종 약도 주고 2주간 집에서 먹을 약도 처방해 주고, 34일 동안 잠도 자고 밥도 먹었는데 23만원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 나 때문에 더 낸 돈을 빼면 평소에는 13만원 정도를 내고 나간 모양이다.

암이라는 게 하루 이틀 치료가 아니니 돈 십만원이 작은 돈은 아니겠지만, 하루 만원 하는 병실료와 식대도 참 싸지만, 나머지 의사의 진료와 간호사의 돌봄, 병원이 제공하는 의료서비스의 가치도 참 싸게 매겨져 있다는 씁쓸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퇴원하는 그의 가방 속에는 상어연골을 포함한 온갖 종류의 비타민, 건강보조식품, 홍삼엑기스 등이 가득 들어 있는 걸 보니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환자들은 비싼 지푸라기라도 잡으며 의사에게 꼭 듣고 싶어하는 말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의사는 의과대학 학생으로 교육받을 때부터, 그리고 의사생활을 하는 내내, 단지 법적으로 문제가 되니까, 보험에 걸리니까 하는 등등의 이유를 다 떠나서 의학적으로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진료할 것을 평생 트레이닝 받는다.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진료를 해서는 안되고, 수많은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제시된 가이드라인에 입각한 치료를 해야한다. 한두 케이스에서 좋은 결과가 있었다는 자신만의 경험을 근거삼아 이를 환자 진료의 원칙으로 삼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의사들은 환자들이 몸에 좋다고 추천받았다며 싸들고 온 건강보조식품에 대해 쉽게 추천하지 못한다. 그렇게 입증되지 않은 약제를 복용하던 일부는 급성간부전으로 병과 관계없이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런 일이 그리 드물지 않다는 사실을 환자들은 잘 모른다.

Compassion fatigue

환자를 보는 매 순간 의사는 우리나라의 의료제도와 의료환경이라는 거대 변수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 미시적 존재인 개인으로서의 의사와 환자, 거시적 존재인 국가와 보험제도 등의 두 존재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결단하며 환자를 마주한다. 최선을 다해도 다한만큼 좋아지지 않은 암환자들, 환자도 힘들고 가족도 힘들고 그걸 지켜보는 의사도 힘들다. Compassion fatigue라는 말은 일반적으로동정심 피로증이라 번역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스트레스를 이해하게 될 때 자발적으로 도덕적 감정이 분출되지만, 그런 일이 반복됨에 따라 이러한 감정이 소모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상에 대한 공감의 능력과 열정이 조금씩 깎여나가고 약화되는 것을 지칭한다. 대형 재난을 당한 사람 등을 위하여 돈과 동정심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데 따른 심리적 탈진 상태를 일컫기도 한다.
동정심 피로증의 증상은 무기력해지고, 삶의 즐거움을 점점 못 느끼게 되며, 지속적인 스트레스와 불안감 및 부정적 태도를 갖게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고, 나 또한 의사가 되고 나서 반복적으로 경험했던 익숙한 느낌인 것 같다. 힘들고 병약한 환자들을 보며, 나는 의사로서 뭔가를 적극적으로 해보고 싶었는데 잘 되지 않고, 시스템에 문제가 있거나 혹은 내 능력이 부족하여 문제 상황이 해결되지 않은 채 반복되는 와중에 내 마음의 열정과 성의가 사그라져 버릴 때, 그래서 우리가 흔히 burn out 되어 버렸다고 말하는 바로 그런 증상인 것 같다. 한 명의 환자를 볼 때는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를 위해 내가 뭔가 최선을 다해서 도움을 주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느끼지만, 그런 환자의 숫자가 급속히 증가하게 되면 점점 무덤덤해지고 가슴아파하지 않게 되는 것이리라. 내가 burn out 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때, 주위 동료가 그런 느낌으로 의욕을 잃고 힘들어 할 때, 그런 소모적이고 허무한 감정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긍정의 마인드를 어디서부터 다시 얻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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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passion fatigue
는 의료직 종사자, 특히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에게 자주 생기는 증상이라고 하는데, 이는 환자에게 매우 직접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어떻게든 탈출구를 찾아야 한다. 환자 한 명 한 명을 가족처럼 아끼고 돌본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늘 그런 식으로 진료하다간 정말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해버릴 것이다. 반면 자신의 감정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해 너무 거리를 두면 환자와 너무 차갑고 딱딱한 관계만이 형성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간 적절한 관계유지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적당한 거리두기일지 모르겠다. 그렇게 거리를 두고 환자를 보면, 환자들은 의사들을 정말 썰렁한 존재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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