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의는 시작되고 학생은 졸기 시작한다

 

의대 수업의 90% 이상은 칠판판서와 필기를 하기보다는 - 요즘이야 의대가 아니더라도 이런 수업을 하는 과가 많지는 않겠지만- 각종 그림과 표로 넘쳐나는 슬라이드를 보면서 진행된다. 엄청나게 많은 양의 사진과 그림, 표들이 지나가기 때문에 필기는 포기한다. 그냥 되는대로 열심히 듣고 나중에 기억나는 것만 이해해야지 뭐, 누군가 필기를 잘 해놨을거야, 그거나 복사하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화면을 응시하는 수 밖에 없다. 슬라이드 화면이 잘 보이려면 강의실 조명은 최대한 낮추는게 좋다. 특히 엑스레이나 CT 등 영상 사진을 보는게 중요한 수업이라면 완전히 깜깜하게 조명을 끄고 시선을 화면에 집중하도록 하는게 필요하다. 나는 정신집중!을 외치며 빨간 레이저 포인터를 따라 교수님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었는데 어느새 레이저포인트 불빛이 내 이마를 가리키고, 모두가 나를 주목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또 졸았구나나만 조는게 아니기 때문에 별로 창피하지도 않았다.

학생 뿐만 아니라, 전공의 시절에는 더 심했던 것 같은데, 컨퍼런스, 집담회 등 갖가지 발표와 강의가 이루어지는 시간이면 불이 꺼지고 슬라이드 쇼의 시작과 함께 졸기 시작하여 고개를 처박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사실 전공의때는 밤에 당직서느라 잠 못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피곤에 찌들어 있다가 컨퍼런스에 들어가 몸을 의자에 기댈 수만 있다면 그건 정말 꿀맛 같은 휴식시간이요, 딱딱한 나무의자가 내 휴식의 보금자리가 되어 주었다. 큰 학회에 가서 보면 교수님이 분명해 보이는 높으신 선생님들도 졸기는 마찬가지였다. 때론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쉬며 수면을 취하기 위해 강의를 듣는게 아닐까 싶게 심한 사람도 있다. 정말 최선을 다해 졸지 않으려고 노력했건만, 실패로 돌아가 버렸던 나의 과거와 현재. 언제쯤 정신 차릴까?

 

어제 있었던 내과 MGR (Medical Ground Round)은 임상의를 위한 흉부 X-ray의 판독이라는 아주 고전적인 주제로 준비되었다. 기존의 MGR과는 다른 형태로, 호흡기내과 교수님이 직접 한시간을 강의하셨다. 아마 교수님 복장을 터지게 한 사건이 있었던 모양이라고 짐작해 본다. 직접 강의를 하시다니… ‘정상사진과 비교하라’ ‘Old X-ary와 비교하라’ ‘먼저 전체적인 그림을 살펴라’ ‘좌우를 비교하라’ ‘심장뒷쪽을 잘 살펴라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를 보면서 임상상황과 비교하여 사진을 판단하라그 정도의 교과서적이고 단순한 메시지가 강의 시종일관 반복되었다. 그 원칙을 지키지 못한 사진들과 함께.

나느 4년 전 이 교수님 파트의 주치의로 일을 했었다. 그때는 교수님이 어찌나 날카롭고 무섭던지 매일 아침 8시에 교수님 회진이 시작되었는데 7 30분이면 꼭 화장실에 가서 설사를 하고 나와야 비로소 움켜쥔 배를 펴고 회진을 돌 수가 있었다. 회진에 신경을 과하게 쓰니 장이 매우 예민해졌는지 나는 두달간 매일 설사를 했었다. 선생님은 나의 헛점, 무식, 환자의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못한 나의 진료양태 등에 대해 원칙적인 코멘트를 하셨고 나는 매일 아침 쥐구멍에 숨고 싶다는 심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선생님은 예의 그 깐깐한 목소리로 강의를 시작하셨다. 아무리 첨단 기법이 동원된 CT나 다른 영상장비들이 개발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내과 의사이고, 일단 첨부터 CT를 찍는게 아니라 나의 오감을 이용하여 시청탁촉진 등의 신체검사와 흉부 X-ray를 기본으로 검사가 시작된다, 찍어 놓고 영상의학과에서 판독 안해준다고 사진도 볼 줄 모르는 내과의사가 되면 되겠냐, 매년 루틴으로 사진을 찍으면서도 찍어놓고 보지 않아 폐암을 놓칠거면 사진을 왜 찍느냐, X-ray에서 충분히 정보를 주는데도 흉부 CT를 찍는 rationale는 뭐냐, 4년전 병동에서 들었던 꾸지람의 전율이 다시 살아난다.

그 사이에 선생님은 말씀하시는 어투도 조금 부드러워지셨고, 혼내는 톤도 예전보다 조금은 낮아진것 같다. 분노나 화 보다는 안타까움이 조금 더 묻어나는 쪽으로 분위기가 바뀌신 것 같다.

선생님은 누구나 다 알만한 흉부 X-ray 사진의 판독원칙을 반복하시며 해당 원칙에 위배되었던 사진들을 보여주셨다.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는 사진들, 내가 전공의 시절 찍었고 제대로 보지 못한 채/제대로 보지 않은 채 지나쳤던 사진들도 있었겠지? 사진을 쫒아가며 촬영연도에만 주목한다. 도둑이 제발 저려서

 

아무리 주옥 같은 말씀을 하셔도

 

나는 선생님 강의를 들으며 가슴이 조마조마하고, 촌철살인같은 선생님의 말씀에 내 과거를 반성하며 사진들을 보고 있는데, 아뿔사, 내 앞쪽의 내과 전공의들과 학생들 너무 많이 쓰러져 있었다. 고개를 꾸벅꾸벅 떨구며 졸고있는 것 같더니 어느새 아예 책상에 팔베개를 하고 잠들어 버렸다. 내 앞뒤로 여기저기 시선을 돌려보니 화면을 보고 있는 학생, 전공의들이 많지 않다. 아니, 이렇게 원칙적인 강의를 들을 날도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전멸 직전이다.

스크린이 내려오면 눈꺼풀도 같이 내려오고, 스크린이 올라가야 다시 눈꺼풀도 겨우 올라가는 그 의대생, 의사의 생리적 현상을 어쩔 수는 없겠지만, 내 마음이 안타까웠다. 내가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이런 강의를 듣고 더 실수하지 말라고 선생님이 강의해주시는 건데잠결에라도 액기스는 챙겨 들었을 거라고 믿어볼 수 밖에 없겠다.

 

다른 카테고리의 글 목록

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펠로우일기 카테고리의 포스트를 톺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