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 - Doctor's life until Feb 2014/펠로우일기

마라톤 풀코스 완주의 추억

이수현 슬기엄마 2011. 2. 27. 16:06

마라톤 풀코스 완주의 추억

2002, 나는 본과 3학년 실습학생이었다. 그 전까지 나는 새벽에 헬스클럽을 다녔는데 병원 실습이 시작되니 과마다 스케줄이 달라 정기적인 운동 시간을 확보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 무렵 마라톤이 유행하기 시작하여, 일산에 사는 나는 호수공원 마라톤클럽에 참여하기로 하였고, 주말이면 일산 호수공원을 비롯 다양한 달리기 코스를 개발해 뛰기 시작하였다. 운동이라는 게 한번 빠져들면 약간 중독이 되는 경향이 있어서인지 난 주말이면 몸 컨디션을 만들어 서너 시간씩 달리기 연습을 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일요일 아침 6시에 호수공원에 나가지 않으면 몸과 마음이 너무 불안했다. 그렇게 6개월 정도 연습한 끝에, 나는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나에게 시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끝까지 다 뛰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대견하고 자랑스러웠으니까. 얼마 전 TV 예능프로그램에서 연예인들이 하프마라톤에 도전하는 것을 봤는데, 그들은 몇 번이고 그만둘까 갈등하고 힘들어하면서 수 시간에 걸쳐 달렸다.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다들 등을 돌리고 울었다. 그걸 보니 나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들이 왜 우는지 아니까
.

마라톤을 완주하고 나서 내가 배운 것은 첫째, 이 길을 뛰는 것도, 걷는 것도, 포기하는 것도 모두 나의 선택이자 의지이며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데 뛰기로 결정하는 것, 묵묵히 그 길을 멈추지 않고 달리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이었다. 둘째, 출발선에서 같이 뛰기 시작했던 이들이 쭉쭉 나를 앞질러 나가도 전혀 초조해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마라톤에 임하는 나의 최대 목표는 기록이나 순위가 아니라 끝까지 완주하는 것이므로 내 앞에 몇 명이 얼마나 좋은 기록으로 경기를 마감했는지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마추어 마라토너인 나는 쓰러지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리는 것이 중요한 사람이며, 그들과 나는 같은 길 위를 달리는 것 같지만 사실 비교할 수 없는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자신이 달리기로 결정한 길을, 자신의 방식으로 달리며,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하기 위해 체력을 안배하고 힘들어도 이를 악물고 견디며 결승선을 향해 달린다는 점에서 말이다. 중간에 달리기를 포기하고 자동차를 타고 휭 달려 결승선에 도착할 수도 있다. 그렇게 결승라인을 밟는 것은 나에게 아무런 감흥과 의미를 주지 않는다. 출발점에서 42.195km를 지난 시점에 도착하는 방법이 자동차가 아니라 내 두 발로, 그 길 위에서 모든 갈등과 고민, 고통을 저울질하며 견뎠을 때 결승선에서의 내가 얻어가는 것은 뭐라 말할 수 없는 충족감으로 가득 차 있게 된다
.
난 이력서나 자기소개서 등의 서류를 쓸 때면마라톤 풀코스 3번 완주라는 나의 경력을 꼭 밝히고 싶은데, 그런 걸 쓰는 칸이 없어서 언제나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하루 한 시간만 나를 위해 쓰자

그러나 나는 꽤 오래 전부터 마라톤을 하지 못한다. 고관절에 dysplasia가 있으니 마라톤은 장기적으로 내 고관절에 좋지 않을 거라는 남편의 충고에 따라 달리기를 멈췄기 때문이다. 달리기를 멈춘 후 다른 운동도 흐지부지 하지 않게 되었다. 인턴 때, ‘나의 젊음은 아직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오기로 10km 단축마라톤에 나갔다가 숨이 차서 죽을 뻔했었다. 레지던트를 시작한 이후에도 마찬가지. 마라톤은 언감생심, 정기적인 운동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저 회진을 운동 삼아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잠을 줄여서라도 해야 할 뭔가가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정해진 시점까지 발표 준비를 해야 하고, 논문을 읽어야 하고, 논문을 써야 해서, 항상 시간이 부족하게 되었다. 밤늦도록 병원을 떠나지 못하고 뭔가를 해야 했다
.

사람의 하루는 24시간이니까 꼭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도 될 일, 중요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잘 분류하여 꼭 해야 하는 일과 정말 중요한 일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누구나 얘기한다. 결국 시간을 배분해서 쓴다는 것은 그 사람의 철학과 인생관, 라이프스타일이 반영된 것이므로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시간은 나를 반영하는 것이고 나아가 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뭔가에 너무 고착되고 집착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았고, 적당히 열심히 하는데도 여유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게 제일 그럴듯해 보일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바쁜 일상에서 운동을 위해, 건강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렵게 되었다. 최소한 펠로우를 마칠 때까지는 불가능하겠지, 라며 포기하고 있었다. 정말 몸이 나빠지고 있다는 걸 자꾸 느낀다. 늘 피곤하고 정신이 맑지 않고 능률도 오르지 않는다. 항상 해야 할 일을 다 못하고 있다는 중압감에서 빠져나오질 못한다. 벌여 놓은 논문들이 마무리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큰 스트레스다. 잡일을 하다보면 모드 전환이 안 되기 때문에 내 일이 자꾸 뒤로 밀리고 좀 차분하게 해 보려고 해도 시간만 흐를 뿐 정작 되는 일이 없다. 정작 나를 위한 일도 아닌 일에 많은 시간을 소모하다 보니 뭔가 손해를 보는 느낌으로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

그러던 중, 얼마 전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연세대학교 안에 1시간 정도면 왕복할 수 있는 산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지난주에 처음 가봤는데 정말 숨이 차고 힘들었지만, 정상에 올라 저 멀리 남산과 한강을 바라보며 땀을 식히니 예전에 마라톤 연습을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앞으론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등산을 해 보겠다고 결심한다. 하루 한 시간은 나를 위한 시간으로 확보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도움이 될 것 같다. 병원과 환자와 동료들을 잠시 멀리하고, 그저 걸으며 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지금 나는 묵묵히 걷고 견디는 것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어쩌면 지금 나는 펠로우 증후군에 빠져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