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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하게 습하고 무더웠던 여름.

지칠 줄 모르고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물러가나보다.

영영 올것 같지 않았던 가을도 

오려나 보다.

바람이 시원해졌다. 


힘들고 지치는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될것 같아 절망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상황도 변하고

어느새 내 마음도 변한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이 절대적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겠다. 


 

장성한 자식들은 다들 성공해서 미국에서, 호주에서, 유럽에서 잘 살고 있는데

한국에 홀로 남은 부부.

환자는 세번째로 난소암이 재발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70 넘은 남편이 치매를 진단받았다.

원래 항암제 독성이 심하게 나타나는 편이었다. 

이번에도 항암치료를 시작하고 보니 남편 시중 들기가 힘들어졌다.

자식들에게 국제 전화를 걸어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다.

환자는 남편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걸까? 백혈구 수치가 오르지 않는다.

당신문제도 속상하고 절망스럽지만, 그녀의 마음 속에는 남편이 무거운 돌이 되어 가라앉아 있다. 



전이성 유방암으로 3년째 잘 지내고 계셨다.

작년에 뇌전이가 생겼지만 방사선 치료를 받고 지난 1년동안 안정적으로 잘 유지되고 있었다.

환자가 혼자 외래를 다니며 치료받았다. 남편은 돌아가셨고 자식들은 바쁘다고 했다.

아직 자기 몸뚱이 하나쯤은 건사할 수 있으니 자식들 신세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빠지고 나는 처음으로 자식을 만났다. 

그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엄마의 병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엄마는 곧 돌아가실 것 같은데 잡아놓은 결혼식 날짜가 다가오고 있다. 

그는 나에게 결혼식을 취소해야 하는 건지 물어보았다. 

내가 그런 대답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결혼식 전에 해야 하는 수많은 의례와 절차들을 괴로운 마음으로 겪어내야 했고 

아침 저녁으로 병원에 와서 깊이 잠든 엄마를 지켜보았다. 

엄마는 자식 결혼식을 못 보고 돌아가셨다. 그리고 자식은 결혼을 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남편과 이혼하고 두 아들을 키우고 있다.

이혼한 남편은 어디론가 떠나버렸지만 환자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재산은 소 한마리. 늙은 시어머니가 소를 부려 농사일을 하신다. 환자는 비정규직 일자리를 찾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5학년짜리 큰아들은 신부전으로 혈액 투석을 해야할 상황이다. 의사는 이식을 권유하지만 지금 형편으로는 가당치도 않다. 시골에 사는 그녀는 한달에 한번씩 아들과 함께 우리 병원에 다니는데, 4개월전 유방암이 폐, 간, 뼈로 재발하였다. 광범하게 전이되었다. 표적치료나 호르몬치료 처럼 비교적 어렵지 않게 치료를 받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삼중음성 유방암이라 항암치료를 할 수 밖에 없다. 빨리 걷거나 언덕을 오르면 숨이 찬다. 항암치료를 설명하는데 그녀는 도통 듣고 있는것 같지 않다. 항암제 부작용이 심했는지 2차 치료를 받으러 오지 않아 몇번 전화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들이 아팠다고 한다. 아들 병원 오는 날짜를 맞춰서 항암치료 날짜를 맞추어야 한다. 엄마가 항암제를 맞는 동안 아들은 먼 친척집에서 하루 엄마를 기다려야 한다. 

세번 항암치료를 하고 CT를 찍어보니 많이 좋아졌다. 나는 기쁜데 그녀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기색이다. 퉁명스럽게 '당연히 좋아져야 하는거 아니냐'고 말한다. 지금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나빠지면 되겠냐고 말한다.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 두 아들, 늙은 시어머니. 그녀는 자기 몸을 돌볼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녀는 웃지 않는다. 항상 긴장된 얼굴. 



우리는 살면서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다, 이제 끝이다, 될대로 되라 그런 마음으로 

지금 닥친 어려움을 견뎌보려고 굳세게 마음을 먹지만, 

살다보면 

더 나빠질 것도 없을 줄 알았던 현실에서 더 나쁜 일이 생기고, 

이 절망의 끝은 어디일까,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런 나쁜 일이 끊이지 않는 걸까

하늘을 원망하게 된다. 


낫지 않는 병으로 마음이 멍들고 

계속 되는 치료로 몸도 힘들다.

경제적인 어려움

가족관계

사회적인 고립감

여유 한줌 들어설 마음이 안 생긴다. 


그런 환자에게 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다. 


오늘도 항암치료 합시다.

다음번 올때 CT 찍고 오세요. 


내 마음도 늪으로 빠져드는 것 같다. 


나도 

내 형편에 어려운 일 숨기고

환자를 만나야 하는 것처럼 

환자도

자기 형편에 어려운 일 숨기고

의사를 만난다. 


그렇게 

삶이

치료가

계속 된다. 


그렇게 

시간이 가면

상황도 변하고

내 마음도 변해있겠지.


이 더위가 지나고 

가을이 오는 것처럼...









  • 2013.09.03 11:56

    비밀댓글입니다

    1. BlogIcon 이수현 슬기엄마 2013.09.03 20:06 신고

      제가 지금 논문을 하나 읽는데요 2011년 JAMA에 실린 중환자실에서 일하는 의사와 간호사들 1950명 (EU 9개 국가) 에 대해 한날 동시에 설문조사를 했는데요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patient care에 적절하지 않은것 같다고 느낄 수록 자기가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고 다른 직장으로 옮길 가능성이 높대요 (다른 변수들 보다도)
      당연한 거겠죠
      논문으로 나왔으니 그런갑다 하지만 말입니다.
      내가 하는 일을 하기 싫다고 느낀다는 건 참으로 힘들고 불행한 일인거 같아요.
      그 일의 본질은 좋은 것이라 인정하면서도 현실적인 조건들에 제약이 많으면 그 일도 하기 싫어지는 법이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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